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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1부
2024-08-01
문화 문화놀이터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1부
'다시 찾은 보물 - 청주의 문화유산'
‘다시찾은보물’은 2023 청주 문화도시조성사업 [다음세대 기록활동]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청주의 문화자원을 6개 테마로 구분하여 글, 그림, 사진으로 엮은 책입니다. 문화유산, 역사인물, 숲길산길, 예술인, 교육유산, 미래유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 편에서는 ‘1권: 문화유산’을 게재합니다.
Cheapter2-1.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청주는 유구한 역사의 도시로서 많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청주 시민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直指)』라 약칭함)이다. 청주를 방문하게 되면 버스터미널부터 거리 곳곳의 정류장과 시내버스에 이르기까지 온통 『직지』를 광고하는 사진들을 쉽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언론사의 홍보물, 그리고 도로명이나 학교와 여행사 또는 각종 회사에서 직지라는 명칭을 수없이 접하게 된다. 심지어 청주를 대표하는 빵 이름조차 직지일 정도로 청주 지역에서 직지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지』는 백운화상 경한(景閑)이 75세 때(1372) 제자인 법린(法隣)·정혜(靜慧)의 요청을 받아들여 임제종 18대손인 석옥(石屋) 선사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2권으로 편집한 불교 서적으로서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즉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요체가 되는 과거칠불로부터 석옥의 제자인 법안(法眼) 선사에 이르는 역대의 부처와 조사들의 법어·게송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목은 ‘직지인심’에서 따왔다.
이 책이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된 것은 백운화상이 입적한 3년 후인 고려 우왕 3년 즉 서기 1377년이다. 『직지』의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문하생 석찬과 달잠이고, 출판자금을 댄 사람은 비구니 묘덕(妙德)이다. 이때 간행된 상·하 2권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하권 1책뿐이며,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일찍이 프랑스의 서지학자인 모리스 쿠랑(Courant, M.)이 1901년에 편찬한 『한국서지 Bibliographie Cor0x8045enne』의 부록에 소개된 바 있으나 책의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1972년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도서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에서는 『직지』 영인본을 만들어 도서관과 주요 연구기관에 전파하는 한편, 초중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우리나라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대표되는 목판인쇄와 더불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직지』를 소개하였으며, 5개 국어로 번역 배포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목판과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임을 세계에 자랑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직지』가 왜 프랑스에 가 있는지 궁금해 하며, 규장각도서처럼 『직지』도 프랑스가 약탈해간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직지』가 한국에서 수집되어 프랑스로 건너가고 다시 국립도서관에 들어가기까지는 파란 많은 사연이 있었다. 『직지』를 프랑스로 가져간 사람은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이다. 1886년에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초대 주한 대리공사로 부임하였는데, 조선에 오기 전 중국에 근무할 때부터 동양문화에 심취해 있었으므로 조선에 근무하면서 각종 고서와 문화재를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수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01년에 모리스 쿠랑이 간행한 『조선서지』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프랑스로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대부분의 고서는 그의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1911년에 드루오 호텔에서 경매에 붙여졌는데, 『직지』는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y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매입하여 소장하게 되었고,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쁠랑시가 고서를 모교에 대부분 기증하면서 『직지』는 별도로 경매로 넘긴 사실이다. 이는 쁠랑시가 이미 『직지』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베베르 역시 『직지』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인식하고 국립도서관에 기증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 수장고에 꼭꼭 숨어있던 『직지』는 1972년 전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책 전시회’에 『직지』가 전시됨으로써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세계적인 공인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에 『직지』가 알려지면서 청주의 학계에서도 크게 주목하였다. 『직지』를 인쇄한 곳이 청주 흥덕사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그 흥덕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와 고문헌에서 흥덕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옛 절터에서 ‘흥(興)’자가 쓰인 유물만 발견되어도 흥덕사지가 아닌지 추론하기도 하였고, ‘흥’자가 들어간 지명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북이면 영하리 마을에 전해지는 석탑에서 일제강점기에 ‘흥복(興福)’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사리장치가 나온 바 있다고 하여, 이 절터가 혹시 흥덕사지일 수도 있다는 다소 무리한 추정도 제기되었고, 오송읍 연제리의 저수지가 조선 후기에 ‘흥덕제(興德堤)’로 기록된 것에서 유추하여 그 주변에 흥덕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도 하였다. 추측은 추측으로 끝나고 흥덕사지의 위치는 미궁 속으로 빠지고, 한두 해 지나다 보니 점차 관심에서도 멀어져 거의 잊게 되었다. <2부에서 계속>
Cheapter2-1. 직지의 산실 흥덕사지 이야기
청주는 유구한 역사의 도시로서 많고 다양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청주 시민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直指)』라 약칭함)이다. 청주를 방문하게 되면 버스터미널부터 거리 곳곳의 정류장과 시내버스에 이르기까지 온통 『직지』를 광고하는 사진들을 쉽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관공서와 언론사의 홍보물, 그리고 도로명이나 학교와 여행사 또는 각종 회사에서 직지라는 명칭을 수없이 접하게 된다. 심지어 청주를 대표하는 빵 이름조차 직지일 정도로 청주 지역에서 직지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지』는 백운화상 경한(景閑)이 75세 때(1372) 제자인 법린(法隣)·정혜(靜慧)의 요청을 받아들여 임제종 18대손인 석옥(石屋) 선사로부터 받은 『불조직지심체요절』을 증보하여 2권으로 편집한 불교 서적으로서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즉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요체가 되는 과거칠불로부터 석옥의 제자인 법안(法眼) 선사에 이르는 역대의 부처와 조사들의 법어·게송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목은 ‘직지인심’에서 따왔다.
이 책이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간행된 것은 백운화상이 입적한 3년 후인 고려 우왕 3년 즉 서기 1377년이다. 『직지』의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문하생 석찬과 달잠이고, 출판자금을 댄 사람은 비구니 묘덕(妙德)이다. 이때 간행된 상·하 2권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하권 1책뿐이며,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일찍이 프랑스의 서지학자인 모리스 쿠랑(Courant, M.)이 1901년에 편찬한 『한국서지 Bibliographie Cor0x8045enne』의 부록에 소개된 바 있으나 책의 행방이 묘연하였는데, 1972년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도서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에서는 『직지』 영인본을 만들어 도서관과 주요 연구기관에 전파하는 한편, 초중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우리나라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대표되는 목판인쇄와 더불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직지』를 소개하였으며, 5개 국어로 번역 배포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목판과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임을 세계에 자랑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이 『직지』가 왜 프랑스에 가 있는지 궁금해 하며, 규장각도서처럼 『직지』도 프랑스가 약탈해간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직지』가 한국에서 수집되어 프랑스로 건너가고 다시 국립도서관에 들어가기까지는 파란 많은 사연이 있었다. 『직지』를 프랑스로 가져간 사람은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2)이다. 1886년에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초대 주한 대리공사로 부임하였는데, 조선에 오기 전 중국에 근무할 때부터 동양문화에 심취해 있었으므로 조선에 근무하면서 각종 고서와 문화재를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갔다.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수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01년에 모리스 쿠랑이 간행한 『조선서지』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프랑스로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쁠랑시가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대부분의 고서는 그의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기증하고 나머지는 1911년에 드루오 호텔에서 경매에 붙여졌는데, 『직지』는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y Vever, 1854~1943)가 180프랑에 매입하여 소장하게 되었고, 1950년경에 그의 유언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쁠랑시가 고서를 모교에 대부분 기증하면서 『직지』는 별도로 경매로 넘긴 사실이다. 이는 쁠랑시가 이미 『직지』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베베르 역시 『직지』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인식하고 국립도서관에 기증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 수장고에 꼭꼭 숨어있던 『직지』는 1972년 전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해 유네스코에서 정한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책 전시회’에 『직지』가 전시됨으로써 현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세계적인 공인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에 『직지』가 알려지면서 청주의 학계에서도 크게 주목하였다. 『직지』를 인쇄한 곳이 청주 흥덕사라고 명시되어 있으므로 그 흥덕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리지와 고문헌에서 흥덕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옛 절터에서 ‘흥(興)’자가 쓰인 유물만 발견되어도 흥덕사지가 아닌지 추론하기도 하였고, ‘흥’자가 들어간 지명을 주목하기도 하였다. 북이면 영하리 마을에 전해지는 석탑에서 일제강점기에 ‘흥복(興福)’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사리장치가 나온 바 있다고 하여, 이 절터가 혹시 흥덕사지일 수도 있다는 다소 무리한 추정도 제기되었고, 오송읍 연제리의 저수지가 조선 후기에 ‘흥덕제(興德堤)’로 기록된 것에서 유추하여 그 주변에 흥덕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도 하였다. 추측은 추측으로 끝나고 흥덕사지의 위치는 미궁 속으로 빠지고, 한두 해 지나다 보니 점차 관심에서도 멀어져 거의 잊게 되었다. <2부에서 계속>